제목: 여행의 이유
저자: 김영하
주제분류: 에세이
출판연도: 2019
여행의 이유를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고찰하는 에세이. 여행과 글쓰기, 소설가의 삶을 연결 지은 에세이
한창 알쓸신잡에 빠져있을 당시 김영하 작가님이 출간하신 여행 에세이입니다. 교보문고 사인회도 다녀왔어요.
이번에 엄마랑 홍콩 여행 가는데 제가 이틀 먼저 출국했던 지라 혼자 여행하는 시간 동안 읽을 책으로 《여행의 이유》를 골랐습니다.
1. 책의 도입 부분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둥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는 공항에서 항공권을, 더더군다나 편도는 사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추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p9)
이렇게 시작하는 책에 어떻게 흥미를 느끼지 않고 이렇게 시작하는 책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난생처음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나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p16)
이 조차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마인드가 김영하 작가님을 표현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p18)
2. 여행이란 무엇인가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p65)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p117)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중략) 그러나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중략)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 이들에게 여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p191)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p203)
작가님이 말하는 여행이란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믿음을 바꾸어 가고 그러나 이를 통해 나 자신을 깨닫는 것,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나 돌아올 곳이 있는 것, 다른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3.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책을 읽기 전 저에게 여행이란
- 늘 갈망하는 것
- 충전의 시간
-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상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의 여행 경험을 되돌아보았어요.
- 나는 늘 여행을 철저하게 계획하지만, 계획을 수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연이 주는 경험과 즐거움이 작가님이 말하는 인상적인 실패와 비슷한 역할이리라.
- 작가님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는 호텔방을 좋아하듯 나는 감성적으로 꾸며져 있는 숙소 방을 좋아한다. 작가님에게 호텔이란 슬픔을 모두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이듯 저에게 감성적으로 꾸며져 있는 숙소 방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미적 감각이 충족되어 있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 멋진 곳에 가서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이 일인칭의 경험이기 때문에 셀카를 찍으려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이 여행하고 여행의 감정과 기억을 나누는 시간들이 소중했나 보다.
-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여행기(여행 에세이나 여행 영상)에는 흥미가 잘 생기지 않는다. 내가 직접 한 여행이 더 생생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나의 여행 경험을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여행기에도 더 관심을 가져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4.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은 《여행의 이유》지만 여행과 소설, 여행자와 소설가를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소설가의 삶을 살짝, 아니 꽤 깊숙이 엿보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선택지가 될 거예요.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p21)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p26)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p57)
소설 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비록 내가 창조했지만) 낯선 세계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p63)
모국어의 바다를 떠나면 이런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신선도에 덜 민감해진다.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p79)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가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에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러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님으로 인해 제약이(국경 없이 활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 영어, 스페인어 사용자들이라고 하죠.), 혹은 무수한 노력(영어 공부)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와중에 '모국어의 바다', '언어의 신선도'라는 표현을 읽으니 이 표현들을 꼴 기억하고 싶어 졌어요.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p80)
여행이 오히려 영감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포인트가 의외로 느껴졌어요. 저는 여행이 새로운 세계를 보는 통로이고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어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앞서 보았던 '모국어의 바다' 이야기와 연결 지으면 충분히 이해가 가더라고요.
5. 총평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에세이, 술술 읽히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에세이, 추방당하는 경험을 비롯하여 갖가지 흥미로운 여행 경험을 읽을 수 있는 에세이, 여행 에세이이지만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에세이였습니다.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지금까지 4권 읽어보았는데(《살인자의 기억법》, 《빛의 제국》, 《여행의 이유》,《오래 준비해온 대답》) 모두 좋았습니다. 작가님의 책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