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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자두 / 소설로 마주하는 잔인하고 두려운 현실

by 독서하는 하루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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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두와-추희-자두를-올린-베이글
「자두」와 가을자두 추희를 올린 베이글

 

 

<창작과 비평> 2020 여름호에 「자두 도둑」으로도 실렸던 소설입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예쁜 빛깔의 표지에 반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데려왔는데, 내용은 찝찝한 기분은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이 책은 분명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이고,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p20)

 

이 책을 읽으면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언젠가 마주할지도 모르는 잔인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마 주하니 가슴이 턱 막히고,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2. '병'과 '간병'이라는 극한 상황

시아버지의 극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p31)

 
 
'나(은아)'와 남편 세진은 사랑과 믿음으로 부부생화을 해왔고, 신사적인 시아버지(안병일)는 혼자서도 살림을 잘 꾸리고 문화생활을 하고 며느리를 친딸처럼 예뻐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암 투병으로 모든 상황이 바뀝니다.
 
 

그렇게 자식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다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노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다리에 힘을 잃었습니다. 혼자서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본인도 놀라 침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 망연자실한 눈빛을 마주하고 세진이 울었습니다.
(p38)


병은 환자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걷는 것도, 씻는 것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니 인간의 존엄성이 헤쳐지는 것도 같았습니다.
 
 

아팠습니다. 피로했습니다. 마음이 황폐해졌습니다. 집안일은 점점 엉망이 되었고 번역 일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출판사에 마감을 미뤄달라고 한번 더 부탁해야 할지 하루에도 몇번씩 고민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환자의 상태였습니다. 입원 기간이 늘어날수록 상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환자가 악화할수록 세진의 감정은 크게 휘청였고, 그걸 지켜보며 제 감정도 혹독한 담금질을 했습니다. 세진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도 점점 줄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한껏 무리하고 있었습니다.
(p38)

 
병이 '간병'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도 얼마나 지치게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 가족이 아프다면... 내가 아프다면... 이런 상황을 현실로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3. 극한 상황에서 공격적으로 내뱉는 진심

세진의 연인이 되고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시아버지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p20)
그애다. 그애. 우리 세진이 뒤를 따라 겨우 수박 한통 들고 온 아이. 반짝이는 내 태양을 가로챈 아이. 내게서 세진이를 빼앗아간 아이. 저 도둑년.
(p84)

 
 
며느리인 '나', 은아의 시점에서 서술되다가 시아버지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부분에는 큰 반전이 있습니다.
 
 

저 애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지금껏 뭐 한 일이 있나? 박사님과 결혼하면서 열쇠 세개를 해왔나? 애를 낳았나? 저 애 때문에 우리 집 귀한 손이 끊겼다."
(p100)

그동안 자식들 수발받을 때는 마음이 편하셨나요? 죄책감 사이로 뾰족한 마음이 쑥 비어져 올라왔습니다.
(p57)

 

또 위기 상황이 어떻게, 얼마나 인간의 숨겨왔던 본심을 공격적으로, 처절하게 내뱉게 하는지를 보여주었어요. 평소의 이성적인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과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행동할 수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그 가면이 벗겨지고 거침없이 본심을 드러낸다는 점이 참 씁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좋은 것은 평소에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많이 보고 내 마음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죠.
 
 

4. '우리' 가족의 범주

그들은 갔고 저 혼자 남겨졌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시아버지의 수액 줄은 자두처럼 검붉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어깨가 저 혼자 떨었습니다. 그때 제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영옥씨였습니다. 저들은 영옥씨도 남겨두고 갔습니다.
(p104)


시아버지, 고모, 세진이 휴게실을 나가고 남겨진 '나'와 영옥씨. '우리'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이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턱 막힐 만큼 안타까웠고, 우리 가족의 모습에 이입되기도 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 서로 맞춰나가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을 텐데, 그 중 '우리' 가족의 범주는 어떻게 맞춰나갈 수 있을지... 막막함이 떠오릅니다. 이 장면을 읽고 가장 크게 망연자실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제수씨 고생한 거, 다 아는데, 우리 마음에는요. 여기서 '우리'란 과연 누구부터 누구까지를 포함하는 것일까, 당연히 저는 들어가지 않을 테고, 세진은 포함되는 것인가,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제수씨가 당숙을 모시고 살았으면 좀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p117)
저는 세진을 보았습니다. 세진이 나서서 한마디 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당장 그 입 다물라고,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우리'일에 나서지 말라고, 말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중략)
"미안해요, 형.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나쁜 놈이에요."
(p117)

 

잊으려 하고 용다서하려고 했던 은아의 노력이 무참히 무너지던 겨울날의 장례식. 다시 '우리' 가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은아는 장례식을 마치고 몇달 후 봄 세진과 헤어집니다. 저에게는 또 한 번 충격을 안겨준 장면입니다.
 
 

5. 한국사회 가족 안에서 여성의 존재

책의 뒷표지와 책의 말미의 해설에서는 한국사회 가족 안에서 여성의 존재, 가부장제 비판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처음에는 노년, 병, 간병에 대한 생각거리들이 더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곱씹어 볼수록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시아버지가 은아를 자신에게서 세진을, 자신의 태양을 가로챈 도둑년이라고 생각하는 점.
- 시아버지가 은아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눈치를 주는 점. 
-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하지 않는 것을 허용해준다는 것 같은 태도.
- 섬망이 온 시아버지는 간병인 영옥씨를 죽은 아내 숙이로 생각하는데, 영옥씨에게 호통치고, 욕하고, 폭력을 가하는 점. 숙이가 고생만 하고 세진이 박사님 되는 것을 못 보고 죽은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영옥씨를 대하는 태도에서 아내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시아버지가 숙이를 훔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점.
- 최소한의 의무만을 다하고 환자의 험담을 하지만 남자 간병인이라는 이유로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점. 시아버지도 남자 간병인을 훨씬 어려워했죠. (강약약강의 모습이기도 하네요.) 
 
우리 사회에 은연 중에 깔려 있는 가부장제에 대해 조곤조곤 비판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이미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바꾸어 나가야 할 점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또한 제가 이 책을 통해 아픈 현실을 마주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한 가정 속에서 여성인 '나와 여자 간병인으로서 사회적 약자인 영옥씨가 담배 두 대로 말 없이 나눈 마음...저도 숨죽이며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 영옥씨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는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옥씨의 행동을 모두 이해시켜주는 비하인드 스토리이기도 했지요.)

 

책-자두와-브리-치즈를-올린-자두-토스트
자두는 맛있고 「자두」는 흡입력 있다.

 

 

초반에 화자가 번역가로서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고 소설이 구조화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정말 흡입력 있었고 거의 한 호흡에 책을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니 초반의 이야기도 이해가 가더라구요. 
아이러니하게도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해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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