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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냉정과 열정사이 Rosso / 에쿠니 가오리 / 2000 /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그려내는 일본인의 사랑 이야기

by 독서하는 하루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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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안에서-읽는-책-냉정과-열정-사이-로쏘
시골 풍경을 가로지르는 기차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 약속해 줄 거야?
그렇게 말한 것은 나였다.

- 피렌체의 두오모에, 너랑 오르고 싶어.
같이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어디에 살든, 우리는 같이 있고, 그곳에서 같이 떠날 거라고. 피크닉처럼.
- 피렌체의 두오모? 밀라노가 아니고?
이상하다는 듯 묻는 쥰세이에게, 나는 자라으럽게 대답했다.
- 피렌체의 두오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니까.

 

 

대학생 때 읽고 펑펑 울었던 책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읽으면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여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몸은 다른 도시로 떠나는 기차에 싣고 마음은 책을 읽으며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1.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그려내는 일본인의 사랑 이야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인의 사랑 이야기라니 정말 독특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습니다. 당연히 이탈리아행에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는 아니었지만 두오모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떠올리던 그때를 잊지 못하겠어요.

 

 

두오모에서-내려다-보는-피렌테-거리
두오모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 거리.

 

 

두오모의-아름다운-곡선
아이러니하게도 두오모에 오르면 아름다운 두오모를 볼 수 없습니다. 조토의 종탑에 올라야만 비로소 두오모의 아름다운 곡선을 볼 수 있죠.

 

2. 아오이는 어떤 사람일까?

주인공 아오이는 상처 입었고,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음에도 쓸쓸하고, 목욕과 독서를 좋아하는 무위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아오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오이가 변했다며, 사람을 멀리한다고 말하면서도 늘 아오이의 곁을 지키는 밝은 모습의 여섯 살 때부터 친구 다니엘라, 모두 아오이를 대하기 어려워해도 한 사람만은 다른, 아오이가 게으름을 피워도 용서해주는, 아오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걸 알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아오이가 함께 해 주었으면 한다는 마빈, 아오이의 과거의 사랑을 모두 알고, 그렇기에 아오이를 더 사랑으로 감싸주고 보듬어주는 페데리카, 아오이를 걱정하는 알베르토와 지나와 파올라, 그리고 루카와 안젤라와 다카시까지. 

아오이는 어떤 사람일까, 책을 덮고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 직장인이 되고 읽으니 아오이의 삶이 그저 부럽습니다. 보석 가게에서 일주일에 사흘 일하고, 저녁이면 목욕물을 받고 칵테일 한 잔에 책을 읽는 삶을 살아가는 아오이!

 

3. 아오이 같은 쓸쓸하고 담담한 문체

페데리카는, 잘 됐구나,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공중에 매달린 채,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창문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p38)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나쁜 점은, 기억이 뒤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꼼짝않고 있으면 기억도 꼼짝않는다. (p139)

 

봉인한 기억. 뚜껑을 닫아 종이로 싸고, 끈으로 묶어 멀리로 밀쳐 내버려싸고 여긴 기억. (p178)

 

 

 

4. 아오이와 쥰세이의 사랑은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10년, 그 시간이 한줌 보잘것없는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비켜 놓으면, 없었던 것처럼 될 것 같았다. 10년. 하지만 동시에, 현기증이 일 만큼 긴 세월이란 생각도 들었다. (p245)

 

 

처음 읽었을 때는 아오이와 쥰세이가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한 때가 있었지만 그만큼 냉정하게 미워하는 기간이 길었기에, 그 간극을 다시 메꿀 수 없다고 생각했죠. 애정이 아닌 그저 그리움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현기증이 일 만큼 긴 세월이란 생각도 들었다.'에 더 중점을 두어 읽었던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다시 읽은 지금, 이렇게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걸 서로 알았는데, 그렇다면 애정이 아닐까? 왜 아오이는 오후 기차로 돌아가야만 할까? 의문이 듭니다. 어쨌든 쥰세이 때문에 아오이는 마빈과도 행복하지 못했잖아요. 결국 아오이는 쥰세이와 함께 행복을 되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5. 마빈의 사랑

물론! 아오이가 마빈과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오이에게도 마빈에게도 현실적인 해피엔딩.

 

"만나고 싶다."
욕조에 걸터앉아, 내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마빈이 말했다. 새벽 2시의 목욕탕은 밤과 뜨거운 물 냄새.
"누구를?"
포도주를 몇 잔이나 온몸에 내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양손을 흔들흔들 흔들어 본다.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스물여섯 살의 아오이를."
마빈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말한다.
"사랑했어, 아주"

 

 

나는 병뚜껑을 열고, 코르크 마개를 하나하나 테이블에 늘어 놓았다.

아오이에게. 사랑을 담아(To my AOI with love).

아오이에게. 당신의 생일날(To my AOI on your birthday).
아오이에게. 11.2.1995.(Dear AOI)

코르크 마개 하나하나에는 마빈의 동글동글한 글자가 쓰여 있다. 둘이서 특별한 식사를 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쓴 것이다.

아오이에게. 마빈(To AOI. Marvin).
백만 번의 키스를 담아(With mllions of kisses).
아오이에게. 크리스마스 1996(To AOI).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일고, 간혹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본다. 코르크에서 이미 포도주 냄새는 사라져 없고, 그저 건조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날 뿐이다. (p105)

 

 

마빈은 아오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줍니다. 현재의 아오이를 사랑해줍니다.

마빈만 생각하면... 아오이는 아주 나쁜 사람이군요.

 

 

6. 장소에 관한 이야기

인생이란,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성립하는 것이란 단순한 사실과, 마음이란, 늘 그 사람이 있고 싶어하는 장소에 있는 법이란 또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 이 소설을 낳게 하였습니다. (p261-저자후기中)

 

 

저자 후기에서 알 수 있듯 「냉정과 열정사이 Rosso」는 장소로 사랑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돌아갈 장소.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것일까.
잠 못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08)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는, 오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과, 거기로 내려다보이는 밀라노 거리, 작업대에 널려 있는 공구 하나하나와, 빨갛고 조그만 체라 조각. 오늘, 5월 25일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 (p234)

 

"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p210)

 

내내,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p225)

 

 

다니엘라가 있는 밀라노, 파올라와 지나가 있는 밀라노. 내일부터 나는 나의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일을 하고, 끝까지 친절하였던 마빈을 보내고, 처음부터.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내 인생이 있다. (p253)

 

 

 

「냉정과 열정사이 Blu」이야기를 살짝 하자면 쥰세이는 과거로 역행하는 피렌체에 살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부터 시간이 멈춰 버린,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피렌체. 그렇다면 쥰세이는 아오이와 사랑하던 과거에 살고 있고, 아오이가 피렌체를 떠올리고 피렌체의 두오모로 가는 것은 쥰세이가 있는 곳에 아오이의 인생도 있기 때문일 것 같아요.
아오이가 밀라노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쥰세이가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아오이의 인생이 아닌 곳으로. 마빈이 있었어도 밀라노의 공기는 차갑고 눅눅했었죠.

 

 

6. 나의 서른 살을 궁금하게 만드는 책

포항 영일대에서 일출을 보며.
일출 보려고 일찍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지 못해 그냥 책을 읽었습니다. 책 한 번, 바다 한 번, 책 한 번, 바다 한 번.

 

곧 서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쥰세이처럼 함께할 서른 살을 약속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른 살에 꼭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냉정과 열정사이」는 저의 서른 살을 궁금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이미 책의 흐름을 알고 있어서인지, 다시 읽고 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가슴이 시린 것은 여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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